논리가 참이라는 다수의 믿음은 그 논리가 참임을 증명하는 근거인가?
가끔 궁금한 것이 생긴다. 그리고 대부분은 해결되지만 가끔은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궁금증들도 남는다. 하지만 그 중에는 '상식이잖아' 또는 '당연하잖아'라는 말로 답이 된다고 하는 궁금증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한 증명 같은 것 말이다.
처음엔 그냥 궁금했다. 아마 누구든 간에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해서 아주 간단한 논리, 납득 가능한 풀이를 보여줬다면 넘겼을 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가끔 떠오르긴 하겠지만, 그런 논리도 같이 떠오르면서 다시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리라.
하지만 여집합의 유일성이나 1+1=2인 이유 등등, 가끔 가다 보면 '상식'에 기댄 법칙들이 있다. 덧셈의 경우에는 그래도 페아노 공리라는 눈가리고 아웅으로 느껴지는 증명이라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한 것은 아직도 보지 못했다.
한때 이에 관해서 주변인들에게 물었었다. 대부분이 유일하지 않다면 그 예는 무엇인가?이다. 나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찾지 못한 것이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반례는 없다'를 보여야 그 법칙이 참이다. 적어도 수학에서는 말이다.
가끔은 이런 궁금증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런 궁금증을 가진 이유는 '가르쳐 주지 않아서'인가, '가르쳐 주었지만 배우지 않아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당연하지만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인가.
첫과 둘은 매우 대립되며, 둘중 하나로 판별하기 쉽다. 전자라면 매우 합당한 궁금증이고, 후자라면 수업시간에 자놓고 뒷북치는 격이다. 하지만, 두 경우다 그러한 납득 가능한 증명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성립된다. 문제는 세 번째일때다. 이런 경우 그런 것으로 한다는 일종의 전제이다. 차라리, 페아노 공리계처럼 덧셈은 다음 연산으로 정의된다.는 방식으로 근간과 엮어버리면 문제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삼단논리의 명확한 예인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전제는 큰 문제다.
그저 빈 땅에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고는 이 건물은 안전하다고 하는 격이다. 그래서 적어도 수학에서는, 이런 기둥들에 대해 수리논리학이라는 검증 도구로 몇 번씩 두드려보고, 금이 가거나 비틀린 곳에서 다시 수리를 한다.
'어떻게든지'말이다. 가끔 그 과정에서 페아노처럼 눈가리고 아웅 같은 논리도 나오지만, 결국 어떻게든 문제를 봉합하긴 한다.
허나 다음 궁금증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말이다.
여집합의 유일성, 덧셈의 교환법칙 성립. 다른 궁금증들은 지금은 딱히 떠오르진 않는다.
어쨌든,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주로 '일반적으로 그렇다'라는 말로 많이 들었다.
또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라는 소리도 나온다.
전에 상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 자연의 많은 부분들은 통계적으로 정규분포도를 따른다. 가끔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다. 일반적으로 우린 상식을 대다수의 사람이 공유하는 기반적인 생각을 말한다. 그리고 대다수를 99%정도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99.9%까지도. 그리고 확통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3
의 범위 안이다. 물론 통계적으로 표본이 클수록
밖에 존재하는 예시들도 많아진다. 하지만 이들은 대다수에 비해서는 매우 적은 수이며, 상식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다....
어딘가에서 발췌한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 우리 아버지가 술취했을 때 자주 나오는 스토리 중 하나이다. 한 5~6번은 들은거 같다.
그리고 항상 생각하지만, 99.9%의 사람이 동의한다는 것과 진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저 '동의'한다면 그것이 진실인가? 더 비꼬자면,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의 믿음'이 어떤 논리가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로 들 수 있는가?
아니다.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진실은 해를 볼수 있는 모든 사람이 눈을 감고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여전히 존재하는 그런 부류일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봤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을 '대다수의 믿음'으로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게끔 하는데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그 뜻은, 상식이라 함은, 계승된다. 정확히는 시간과 상관없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물론 3
밖의 생각이 영향력이 꽤 강해서 오랜 시간 후에는 그 생각이 상식이 될 수도 있지만, 가까운 시간대를 따지면 결국 99.9%의 생각은 90%의 생각으로 변하는 것 이상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 즉 3
의 생각이 퍼지는 것, 상식의 입장에선 전염된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방지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교육'이다.
특정 논리가 진실임이 상식이라고 만드는 방법은, 이 논리가 진실이라고 믿게 만든 다음, 그걸 믿는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가르치는 사람의 영향력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통해서도 좌우된다. 사람은 믿고싶은것만 믿지만, 이것도 결국 무언가를 믿을것인가에 대한 자기 주관이 성립되었을때만 나타나며, 그런 주관이 성립되기 전에는 주변의 의견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주관이 성립되지 않은 집단-주로 유아/어린이 집단-에게 특정 논리는 진실이라는 교육이라는 명목에서의 설파가 결국 99.9%의 대다수를 유지시키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수학에서만 그렇진 않다. 고등학교에서 든 생각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다. 물론 사회학이나 경제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어떤 경향을 보인다', '통계적으로 그렇다'라는 [대다수는 그렇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한다]라는 일반적인 말이다. 그저 관찰을 통해 그 예들을 정규분포도처럼 모았을 뿐이다. 이들은 여집합의 유일성처럼 [예외는 없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법칙을 고등학교때 보았다. 인본주의다. 물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본주의는 지금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아주 좋은 방패이고,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도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누군가는 상관없이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물론 인본주의는 좋은 사상이다. 그것은 부정할 생각이 없다. 다만 [예외는 없다]라는 논리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시간에 느꼈다. 정확히는, 보편윤리에서.
사회에서는 – 적어도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과목에서는- 보편윤리는 시대와 상관없이 통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이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특정 시공간과 인종에서 존재하는 특수 윤리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는 정의이므로 건드릴 것이 없다.
문제는, 보편윤리의 예시로 인본주의를 들었다.
심지어 근거를 듣지도 못했다. 당시의 나는 '그 윤리가 보편적인지 특수적인지에 대한 판단은 바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본주의도 그저 21세기에 만연한 특수윤리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라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그 의문의 이유로 '인본주의가 보편적이라면, 그 인본주의에서 주장하는 인권은 프랑스 혁명 이후로 제안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편적이라는 의미가 혹시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라는 암묵적 정의를 포함하는가?'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변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떤 시대든 간에 형태와 적용 범위는 달랐을지언정 인권 자체는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이 말은 '사람에게는 언제나 인권이 보장되었다. 단지 어떤 개체가 사람인지의 문제였다'이다. 그때 당시에도 순간 당황했다. '언제부터 사람이라는 것이 호모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명칭을 지니는 종족 외의 정의를 지녔지'라는 생각과 함께
지금도 어이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이해는 한다. 어쨌든 교사로서, 먹고 살려면 국가가 제시한 방향을 따라야 한다. 특히, 공인은 정치적 입장을 취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가진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내 주장은 그저 그 방향에 반하는 것이기에 무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본주의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인권을 천부권이라 하며,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편윤리로 고정한다.
이에 대한 것을 교육이라는 수단으로 더욱 공고히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은 교육을 통해 '상식'으로 포장된다.
잡설이 길었지만, 결론은 그렇다. 위에서 제시한 여러 궁금증에 대한 답변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논리로 얻고 싶을 뿐이다. 물론 '상식적으로'라는 논리를 제외한 채로. 페아노공리처럼 어떻게는 끼워 맞추어도 된다. -하지만 여집합의 유일성에 대한 밴다이어그램을 이용한 증명은 거절한다. 이미 밴다이어그램은 증명의 도구로서는 부적합하다는 말을 들었다. 듣기 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이를 이용한 것이 옳은 증명이 아니란 것을 안다.
p.s. 그리고 글을 끝마친 지금, 약간의 걱정이 생긴다. 지평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을지는 모르지만, 이들처럼 과학적 사실 – 언제든지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내 우려는 위의 내 논리- 상식은 항상 진실은 아니다-가 이러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나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우려는, 내 논리가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무시한다는 외형적 특징만으로, 이런 사람들과 동일한 부류로 분류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 두 걱정은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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