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위험한 생각' : 더 위험한 과학책

어렸을 때 나는 문자 그대로 미친 생각, 쓸모없는 생각들을 종종 하곤 했다. 우리 예전 아파트는 13층이었는데, 공 하나를 껴안고 우리 집 13층 창문에서 뛰어내린 후, 땅바닥에 닿기 전에 다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빠르게 공을 아래쪽으로 던져야 하는가라던가, 지나가던 아이 한 명을 아무나 붙잡고 관심사를 물었을 때 나와 관심사가 같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등등...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의 삶에 있어서 그런 질문을 허하게 되는 순간은 점차 줄어갔다. 세상은 내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가며 더 많은 책임과 더 많은 지식을 요구했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도 그러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게 되었고, 가능한 모든 시간을 쪼개어 나에게 주어진 교육과정에 시달려야 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있어 하나의 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예전에 중학교 때는 만화로 되어 있다길래 그냥 재미있게 읽으려고 랜들 먼로의 '위험한 과학책'을 쓱 훓어본 것이었는데, 고등학교에서 -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이 교육과정 속에서 좀 더 업그레이드 되어 돌아온 '더 위험한 과학책'은 어릴 적 나의 향수를 문득 불러일으켰다. 항공기를 착륙시키는 다양하고 엉뚱한 방법이라던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을 뛰어넘는 것, 자동차, 모터사이클, 자전거 등을 사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강물을 증발시키는(!) 것, 강물을 모두 얼리는 것 등등을 고려하기도 하고, 높이 뛰기를 좀 희한한 방법으로 해 볼 거라고 산곡풍을 이용하고 행글라이더를 사용하기도 하는 이 책의 말 그대로 '위험한' 발상들은 내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잊고 있었던 어릴 적의 그 엉뚱발랄함을, 나 자신이 부끄럽게도, 나오라고 두들겼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어린 시절을 잊고 살았던가. 어릴 적에 비해 더 많이 세상에 부딪힌 나 자신이 어릴 적의 모습을 잊는다는 것은, 그 아무것도 모르고 단순히 궁금하기만 했던 그 어릴 적의 모습을 잊는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내가 '위험한' 발상을 꺼려하게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된 것일까.

'위험하다', '쓸데없다'라는 것들. 우리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이 책에 담겨있는 내용들을 중고등학생들이 자기 부모들의 바쁜 걸음을 붙잡고서 문득 물어본다면, 즉 이를테면 "아빠, 내가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탈 때 스케이트 날이 굉장히 미끄러워서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하면, 얼음판은 어떤 경로로 깔려있어야 해?" 와 같이 물어본다면 그 부모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 머릿속에도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말: "쓸데없는 소리나 말고 가서 공부나 해"라는 말이 가능성이 높은 반응으로서 떠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위험하다', '쓸데없다'는 생각들을 정의해놓고 '쓸모'를 위한 길로서 - 그러나 다르게 본질적으로 본다면 나 자신을 '팔아먹는' 길로 밀어넣고 있지 않았던가.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의 휘황찬란한 거짓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늘도 그 거짓말을 그나마 떨쳐보려고 생각은 하지만 용기있게 나서지 못하는 한심한 나 자신이 교육과정에 휘둘리는 꼴... 그래서일까. 이 책의 제목이 오늘따라 나에게 더 다가오는 것은.
이 글은 필자가 '더 위험한 과학책'(랜들 먼로 저, 시공사)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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